전종서의 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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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다 밤을 더 좋아하나요
맞아요. 조금 더 고요하니까요.

밤에만 깨어나는 모습이 있다면요. 어두워지면 어떤 사람으로 변신하나요
밤에는 거의 집에 있다고 보시면 돼요. TV를 유독 많이 보는 것 같고요(웃음). 20대 때는 어두워지면 더 생기가 넘쳤던 것 같은데 30대가 되니 어제를 차분히 돌아보게 되고, 하루를 고요히 정리하고 싶고, 내일을 바라보게 되더군요. 차분해지려는 노력인 것 같기도 해요.

나비 디테일의 드레스는 Blumarine.

나비 디테일의 드레스는 Blumarine.

오늘밤엔 전종서라는 배우의 가장 큰 무기인 눈빛의 힘이 더 선연하게 드러나더군요. 밤 고양이 같은 눈이 유독 강렬하게 담겼던 데뷔작 〈버닝〉(2018)을 기점으로 이후 작품에서도 줄곧 감독들이 그 점을 자유자재로 활용하는 것 같았어요
사람에게 눈빛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렌즈도 잘 끼지 않는 편이고, 사람들의 눈을 잘 들여다보죠. 일상에서 말보다 눈으로 무언가를 드러내는 습관이 연기로 자연스럽게 옮겨진 것 같아요.

방영을 앞둔 〈우씨왕후〉 얘기를 해볼까요. 왕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24시간 안에 새로운 왕을 세우려는 이들의 분투를 그린 이야기예요. 사극은 첫 도전이죠
처음에는 사극이란 장르가 숙제처럼 느껴졌어요. 첫 도전인 데다 촬영이 쉽지 않다는 얘기를 주변에서 많이 들었거든요. 막상 해보니 정말 쉽지 않더라고요(웃음). 날씨의 영향을 많이 받고, 대사 톤도 반연극적인 느낌이고. 하지만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색다른 에너지를 느꼈던 것 같아요.

홀터넥 실크 드레스는 Saint Laurent by Anthony Vaccarello.

홀터넥 실크 드레스는 Saint Laurent by Anthony Vaccarello.

심지어 고구려라는 아주 멀고도 매력적인 시대를 그립니다. 유독 신경 쓴 점이 있을까요
판타지 요소가 가미된 작품이지만, 당시 실존했던 여성을 모티프로 했기 때문에 무게감을 많이 느꼈어요. 특히 대사 톤에 관한 고민이 많았습니다. 보편적으로 일컬어지는 사극 톤이라는 것이 과연 오랜 시간 작품에서 그렇게 쓰였기 때문에 익숙한 것인지 혹은 실제로 그런 말이 쓰였던 건지 고민을 거듭했죠. 결론은 ‘나’의 톤으로 가보자는 것이었어요. 저를 녹여내면서도 균형을 지킬 수 있는 방법에 관해 감독님과 많은 대화를 나눴던 것 같아요.

튜브 톱 드레스는 Loewe. 초커로 연출한 진주 네크리스와 이어 커프는 모두 Tasaki. 비녀는 Archive Scene.

튜브 톱 드레스는 Loewe. 초커로 연출한 진주 네크리스와 이어 커프는 모두 Tasaki. 비녀는 Archive Scene.

우희라는 여자는 어땠습니까. 왕위를 노리는 왕자들과 권력을 잡으려는 여러 부족의 표적이 된 존재이자 ‘장기판의 말’처럼 움직이는 삶을 살지만, 위기에서 진짜 자신의 모습을 꺼내죠. 어쩌면 우리와 동떨어진 삶을 사는 듯한 그의 세계로 들어가는 일이 어렵지는 않았나요
역사를 돌아보면 여성이 주도적으로 행동하고 나섰던, 그러니까 소위 ‘이야기’가 될 법한 인물이 많이 없는 것처럼 느껴지잖아요. 여태까지 제작된 한국영화나 드라마에서 조명된 인물은 여성보다 남성에게 치우친 것이 사실이니까요. 우희는 고구려라는, 여러 방면에서 열려 있던 시대를 휘어잡은 여성이라는 점에서 한국배우로서 한 번쯤 역사에서 주도적 역할을 한 여성을 연기하는 데 큰 의미가 있겠다는 생각으로 출발했어요.

그에게 특히 매력을 느꼈던 부분이 있나요
‘야망’에 관한 부분이죠.

화이트 레이스 톱은 Chloé.

화이트 레이스 톱은 Chloé.

야망이라니, 흥미로운데요
야망이 가득하고, 솔직하고, 집안을 일으켜 세우는 진취적인 사람. 이 여성이 가진 특별한 점은 장기판의 말 같은 존재로 위축됐던 시기에 전혀 그 위치에 서려 하지 않았다는 거예요. 그 시대의 관념을 빌려 표현하면 ‘여성의 탈을 쓴 남성’ 같은 여자라고 생각했어요.

국상 을파소 역의 김무열, 왕 고남무 역의 지창욱, 왕자 고발기 역의 이수혁 등 장르물에서 강렬한 연기를 선보여 온 배우들이 대거 등장합니다. 시너지를 기대하지 않을 수 없겠는데요
연기할 때는 자신에게 집중하는 편이라 최선을 다하되, 상대 배우와의 시너지는 촬영 후에 비로소 느끼는 것 같아요. 완성된 작품을 통해 객관적으로 보여지는 부분 같거든요. 그런데 어느 날 정신을 차리고 보니 정말 현장에 여자배우가 저밖에 없더라고요! 우희의 언니 우순 역으로 정유미 배우가 등장하지만, 대부분 장면에서는 혼자였어요. 낯설고 외롭기도 했는데, 실제로 우희라는 여성은 늘 이런 상황에 놓였겠다는 생각이 들면서 더욱 역할에 몰입하게 됐죠.

오프숄더 프릴 드레스는 Blumarine. 깃털 디테일의 부츠는 Gianvito Rossi.

오프숄더 프릴 드레스는 Blumarine. 깃털 디테일의 부츠는 Gianvito Rossi.

이번에도 액션을 선보이나요
필모그래피상 액션을 가장 ‘덜’한 것 같아요. 왕후가 활에 능한 인물이긴 하지만, 더 과격한 액션은 호위 무사들이 해주셨습니다(웃음).

〈발레리나〉에서 우아한 듯 처절하게 복수를 펼칠 때나 〈몸값〉의 재난 상황에서 원 테이크 액션으로 탈출구를 향해 나아갈 때 혹은 〈모나리자와 블러드 문〉에서 맨몸으로 도망칠 때 등 주인공이 처한 상황에 따라 조금씩 액션 기술을 달리 선보였는데요. 말을 타고 활을 드는 건 잘 맞던가요
활은 엄청난 힘으로 잡아당겨 순식간에 쏜다는 점에서 매력을 느꼈는데요, 말은 엄청 무서워해요. 참 순한 동물인 걸 아는데도 말이죠. 예민하기도, 한편으로는 겁이 많은 것처럼 보였어요.

나비 디테일의 드레스는 Blumarine.

나비 디테일의 드레스는 Blumarine.

의외인데요
대부분 배우들이 승마를 할 줄 아시더라고요. 저도 말을 잘 탈 줄 안다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웃음).

지난 〈엘르〉 인터뷰에서 드라마 〈사랑의 불시착〉을 좋아한다고, 그 사랑에 감동해 울었다고 말하던 당신이 꽤 로맨틱하고 달콤한 사람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습니다. 스스로 로맨틱한 구석이 있다고 보나요
로맨틱한 부분은 잘 모르겠지만, 확실히 사랑이 많은 사람이라고 생각해요.

오프숄더 프릴 드레스는 Blumarine.

오프숄더 프릴 드레스는 Blumarine.

로맨틱한 사람 맞네요
사랑을 많이 받고 자랐어요. 사랑받는 기분이 어떤 것인지 알고, 또 사랑을 주는 법도 알게 됐고요. 그것이 행운이자 축복이라는 걸 갈수록 깨닫고 있어요. 작품으로도 늘 좋은 멜로를 만나고 싶고, 여전히 오래된 멜로 작품을 다시 볼 정도로 좋아해요.

장르 특성상 다크하고 유혈 낭자한 캐릭터를 연기해 왔다는 점에서 대중은 전작이자 로맨틱 코미디인 〈웨딩 임파서블〉을 전종서의 새로운 도전으로 느꼈을 겁니다만, 스스로도 도전이었나요
도전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았어요. 그저 작품이 좋아서 한 건데 반응이 긍정적이지만은 않았다는 생각이 들었죠. 그 이유에 대한 고민도 했어요. 하지만 로맨틱 코미디에는 계속 도전할 거예요. 대중이 무엇을 좋아할지는 수수께끼처럼 계속 풀어나가야 하는 부분인 것 같아요. 배우가 가장 관심을 가져야 할 부분이기도 하죠.

특정 장르물에서 빛을 발한다는 건 전종서라는 일종의 세계관이 있다는 뜻이기도 해요
그건 좋게 받아들여요. 저만의 색깔이 생겼다는 거니까요. 하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니까 반전 모습을 보여드리는 순간이 온다고 생각해요. 그건 억지로 되는 일도 아니고 그저 묵묵히, 또 열심히 하며 언젠가 올 그 ‘타이밍’을 기다리고 또 차근차근 준비할 거예요.

시스루 레이스 드레스는 Mark Gong. 프린지 뮬은 Saint Laurent by Anthony Vaccarello. 이너 웨어 톱과 레드 스타킹은 모두 스타일리스트 소장품.

시스루 레이스 드레스는 Mark Gong. 프린지 뮬은 Saint Laurent by Anthony Vaccarello. 이너 웨어 톱과 레드 스타킹은 모두 스타일리스트 소장품.

촬영현장에서 감각이나 직감을 잘 활용하는 배우로도 알려져 있습니다만
철저하게 계획해서 연기하는 타입은 아닌 것 같아요. 현장 분위기나 상대 배우의 컨디션 등을 흡수해서 그 순간의 직감을 따르는 편인데요. 그래서 그런 말씀을 해주시는 것 같아요.

요즘 전종서의 일상이 머무는 곳은 어디인가요
데뷔하고 처음으로 배우 친구가 생겼어요. 차기작 〈프로젝트 Y〉로 만난 한소희인데, 주로 소희의 집으로 향하죠. 소희가 저희 집에 오기도 하고요. 동갑내기이고 같은 일을 하기에 서로 고민이나 생각을 터놓을 수 있어서 좋아요.

얼마 전 출연한 유튜브 콘텐츠 〈짠한형 신동엽〉에서 신동엽이 당신을 묘사한 말이 인상 깊더군요. “오묘하고 독특하지만 가짜가 거의 없고 진짜인 사람”이라는 말이었죠
하하. 스스로 독특하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데요. 가끔 어른들이 그렇게 말씀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어요. 〈짠한형 신동엽〉을 계기로 신동엽 선배님을 더욱 존경하게 됐는데, 그렇게 말씀해 주시니 감사했습니다. 사실 솔직하기보다 털털한 쪽에 가까운 것 같아요. 내숭도 없거든요.

화이트 레이스 톱은 Chloé. 플라워 패턴의 롱스커트는 Eenk.

화이트 레이스 톱은 Chloé. 플라워 패턴의 롱스커트는 Eenk.

평소 술은 거의 마시지 않는다죠? 그날 촬영에서 일평생 마셔온 것보다 더 많은 양을 마셨다던데(웃음), 이후 술을 즐기게 됐나요
아니요. 제 인생에서 정말 자주 없는 날이었습니다(웃음). 유튜브 나들이는 정말 재밌지만, 역시 저는 좋은 작품을 빨리 만나고 싶은 마음이 더 큰 것 같아요.

작품 공개를 기다리는 마음이란 어떤가요
늘 떨리고 또 설레지만, 적나라한 평가들이 공개되기 시작하면 덜컥 겁이 날 때도 있고, 스스로 더 냉정해지기도 하는 순간인 것 같아요. 그럼에도 매번 그 작품을 통해 다음을 기약하고, 용감하게 도전할 힘을 얻을 수 있으면 좋겠다고 바라요.

곧 가을밤도 옵니다
벌써 가을인지도 몰랐네요. 시간이 이렇게 속절없이 흘러가나 싶은데. 올해는 그냥 이대로 흘러갔으면 좋겠어요. 오늘처럼 그냥 무탈하게, 소탈하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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