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세미
」
시를 짓고 건축을 쓴다. 〈Space〉 선임 기자를 거쳐 ‘도미노프레스’를 운영 중이며, 2014년 서울신문 신춘문예로 등단해 시집 〈내가 나일 확률〉 〈오늘 사회 발코니〉를 썼다.
한 우물만 파야 한다고 들었다. 그래야 성공할 수 있고, 최고의 경지에 오를 수 있다고. 나 역시 그 말에 동의한다. 성실하고 집요하게 한 우물만 판 사람만이 획득하는 깊은 구멍, 종국엔 넓기도 한 구멍을 늘 동경해 왔다. 두 가지 업을 오가며 하루하루를 마감해 온 지 10년을 막 넘어서니 명백하게 알겠다. 사람의 몸은 틀림없이 하나여서 두 우물을 절대 동시에 팔 수가 없다는 사실. 결국 조금 더 부지런히, 전략적으로 두 우물을 번갈아가며 움직일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어떤 날은 어느 한쪽에 제대로 손도 못 대보고 그 사이에서만 우왕좌왕, 갈팡질팡, 헐레벌떡하고 있는 나를 발견할 때면 가소롭기 그지없다.
‘시 짓고 건축 쓰고’라는 문구를 오래전부터 SNS 프로필에 적어두었다. 그 문구를 기억하고 멋지다고 말해 주는 사람들이 종종 있는 걸 보니 내가 하는 일을 꽤 근사하게 설명한 것 같다. 기본적으로 ‘건축’과 ‘시’라는 분야가 주는 신비감 때문에 더 그럴 것이다. 어떻게 건축도 하고 시도 쓰냐는 질문을 많이 받는데 그 경위를 설명하고 나면 맥이 빠지는 건 질문한 사람도, 나도 마찬가지였다. 그 맥 빠지는 대답을 또 반복해 보면 이렇다. 대학 때 건축을 전공하면서 과도한 과업의 범위와 강도, 그에 따르는 밤샘과 마감의 쪼들림 끝에 돌아오는 건 교수님의 매서운 비판이었고, 스스로 건축설계에 대한 재능을 의심하고 있을 때, 귀에 들어온 한 마디. “글은 정말 잘 써.” 슬픈 일이었다. 나는 설계를 했는데 글을 잘 쓴다니.
건축가라는 직업이 타당하지 않다는 사실을 일찍 깨닫고, 졸업 전에 차선책을 마련할 요량으로 국어국문학 수업을 들었다. 처음으로 들었던 수업이 ‘현대문학의 이해’였고, 나는 순식간에 문학의 힘을 이해하게 됐다. 설계할 때와는 다르게 칭찬받으며 시를 썼다. 잘한다니까 잘하게 됐다. 행운도 따라줘서 등단까지 했다. 하지만 시를 업으로 삼는 법을 몰랐고, 여전히 건축을 향한 사랑이 있었기 때문에 졸업 후 건축사사무소에 취직했다. 소장님 앞에서 두 번 정도 울고 나니 결심이 섰다. 건축을 짓지 말고 써보자고. 건축을 잘 쓰기 위해 대학원에 가서 건축이론·역사·비평을 공부했고, 시도 계속해서 썼다. 대단한 계기나 드라마 없이, 또렷한 목적이나 전략 없이, 평범하고 사소한 인과 속에서 나는 시를 짓고 건축을 쓰게 되었다.
건축 전문지 기자와 시인으로 10년을 보냈다. 어떤 날은 내가 사랑하는 두 가지 일을 함께 할 수 있음에 의기양양했고, 어떤 날은 어떻게 해도 한길을 가는 동료보다 늘 부족하다는 생각에 의기소침했다. 두 영역에서 전문성을 벼리는 일은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나는 하루에도 몇 번씩 건축과 시 사이를 오가면서 중간에 푯대를 세우고 땅을 파면 두 우물이 짠하고 합쳐지지 않을까 생각하기도 했다. 하지만 두 우물은 토양도 다르고, 땅을 파는 기술도 달랐다.
이성과 합리를 기반으로 구축되는 물리적 세계. 시대의 기술과 자본이라는 양 바퀴를 달고 예술을 향해가는 건축은 세상을 시스템적으로 바라보게 한다. 건축가가 그리는 조감도, 평면도, 입면도, 단면도는 선명한 사회적 약속이다. 나는 그 약속과 시스템을 통해 휴먼 스케일을 뛰어넘는 세계를 조망하게 된다. 반면 시를 쓸 때는 보이는 것을 질료로 삼아 보이지 않는 세계의 문턱을 넘는다. 기존의 관습적인 프레임을 철거하고 내면의 절벽 앞에 서서 오로지 언어만 붙잡는다.
이렇게 서로 다른 건축과 시를, 그것도 유사성과 관계성을 따지는 일이 지극히 비유적 층위라고 느낄 때가 많았다. 주변에서 기대하는 것처럼 두 세계의 언어를 섞으려는 시도도 해봤지만, 이제 억지는 부리지 않는다. 하지만 가끔 건축을 설명하는 언어의 한계를 느낄 때 문학적 언어가 어디선가 흘러 들어오기도 하고, 시를 쓰며 문학적 상상력의 한계를 느낄 때 건축의 패러다임이 창문을 열어주기도 한다.
두 우물을 동시에 팔 수는 없지만, 어떤 순간에는 두 우물이 연결되는 것을 경험한다. 가장 좋은 건 한 우물을 파는 일에 간절한 나머지 내가 파놓은 구멍에 내가 묻히는 우를 범할 새가 없다는 것이다. 그것만이 자신의 전부라는 절실함이 성공 여부와는 상관없이 정신을 훼손하는 것을 자주 목격했다. 한편 두 우물을 파고 있는 자, 대상에 대한 각각의 사랑과 거리를 지키며 바쁘게 파고 또 판다. 가끔 고개를 쳐들고 눈물을 훔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