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라테스를 시작한 지 5개월이 지났다. 드라마 각본을 쓰기 시작한 후로 운동에 빠졌다. 도돌이표 같은 작업에 스트레스를 잔뜩 받고 있던지라 성취에 목말라 있었고, 목표한 횟수를 채웠다는 것만으로도 그날의 성취를 안겨주는 운동은 좋은 선택지였다. 그렇게 홀로 1년 반 넘게 일명 ‘쇠질’이라는 헬스를 하다 보니 발달한 근육 위주로 사용하는 습관이 생겼다. 필라테스를 하기로 마음먹은 건 그런 이유에서였다. 몸과 삶의 균형을 찾고 싶은 욕구가 올해 초에 강하게 들었다. 올해 초에 나는 모든 것이 어영부영한 상태였다. 번아웃이 온 건가 싶었지만 오히려 일하지 않을 때 마음이 더 힘든 걸 보니 여전히 일이 즐겁긴 한 모양인데, 이전만큼 열정으로 일을 밀고 나가기에는 힘에 부쳤다. 일을 제대로 하고 있는 건 맞는지, 재능이 있는 건지, 어쩌면 아무것도 없는데 너무 있는 척하는 건 아닌지…. 금방 끝날 줄 알았던 일이 몇 년 이상 길어지면서 생겨난 건 스스로에 대한 의심이었다. 능력과 자질, 재미, 좋아하는 것까지. 의심은 불확실로, 불확실은 선명하지 못함과 혼란으로 잘게 쪼개졌다. 그 결과 내가 어떤 사람인지 도무지 모를 지경에 다다른 것이다.
필라테스 선생님은 손끝의 감각이 섬세하고 말수가 적은 사람이다. 수업은 체형 교정 위주로 진행됐는데, 첫 수업은 내가 어떤 근육을 어떻게 쓰는지, 왼쪽과 오른쪽 중 어느 근육이 더 발달했고 짧은지, 어느 관절에서 소리가 나는 지 등을 체크했고, 육안으로 잘 보이지 않는 깊은 근육은 손끝으로 만져가며 근육의 수축과 이완을 확인했다. “세 번만 더 할게요. 하나, 둘, 셋….” “왼쪽이랑 오른쪽 차이가 있었나요? 제가 느끼기에 회원님은 왼쪽이 더 유연하세요.” “그래도 오래 앉아 계시는데 어깨가 안 굽으셨어요. 약간 말려 있긴 한데, 이쪽 근육을 단련하면 금방 펴질 거예요.” 뇌 속에 인체 대해부도가 생생하게 펼쳐져 있기라도 한 듯한 인체와 근육에 대한 지식도 믿음직스러웠고, 수업에 필요한 말 외에 다른 주제는 일절 꺼내지 않는 방식도 마음에 들었다. 그렇게 몇 차례나 수업을 재등록하는 동안 나는 선생님과 침묵 속에서 몇 개월을 보냈다. 그래서 말수가 적고 무뚝뚝한 사람이라 믿고 지냈는데, 어느 날이었다. 일찍 도착해 유산소운동을 하고 있던 나는 선생님이 다른 회원과 크게 웃으며 떠드는 것을 목격했다! 다른 회원과 일상적인 이야기를 나누는 선생님을 목격하며 가장 먼저 든 생각은 ‘혹시 내가 너무 재미없는 회원인가?’와 ‘선생님, 되게 재미있는 이야기도 잘하시네’였다. 그리고 그날, 나는 수업을 받은 지 몇 개월 만에 선생님께 말을 걸었다. “어쩌다 이 일을 시작하게 되셨어요?” 선생님은 학생 때부터 체육시간을 가장 좋아했고, 운동도 좋아해서 어릴 땐 이런저런 운동을 취미로 많이 했다고 했다. 그러다 필라테스에 빠졌는데, 섬세하게 근육을 쓰는 게 즐거웠다고 했다. 선생님은 마치 우리가 늘 수다를 떨어왔던 것처럼 능수능란하게 대화를 이끌었다. 그런 선생님을 보고 있으니 이런 질문을 던지지 않을 수 없었다. “선생님, 혹시 제가 너무 재미없게 수업을 받는 학생인가요?” 선생님은 곧장 내 질문의 뜻을 알아듣고 웃었다. “저는 회원님 성향에 맞춰 수업해요. 같이 떠들어야 즐거워서 수업하러 오는 회원님이 있는가 하면, 운동 강도를 높여야 좋아하는 회원님도 있고요. 회원님은 늘 생각이 많아 보였어요. 본인에게 집중하시는 것 같아서 일부러 더 말 걸지 않았어요.” “일을 참 멋있게 하세요. 확신을 갖고 하시는 것 같아요.” “글쎄요. 일을 잘한다기보다 저는 그냥 타인의 눈치를 좀 살피고 잘 맞춰주는 성격이에요. 하는 일이랑 성격이 운 좋게 맞는 거겠죠.” “선생님은 원래부터 이렇게 내 일에 대한 확신이 있으셨나요?” “음, 아뇨. 근데 저는 이거 말고 딱히 하고 싶은 게 없어서 그냥 해요. 저는 그냥 할 수 있으니까 하는 사람인데, 이런 게 문제가 될까요?”
아무것도 문제 될 것 없지 않나? 순간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내가 어떤 사람인지, 스스로 어떻게 정의 내리든 그게 어떤 문제가 되겠는가. 이럴 수도 있고, 저럴 수도 있고, 틀릴 수도 있고, 맞을 수도 있는 거지. 순간 계속 가지고 있던 응어리가 풀리는 느낌이었다. 내가 나를 너무 재단하고 있었구나. 생각보다 괜찮은 사람이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에 겁먹고 있구나. 하지만 괜찮은 사람이 아니어도 어떤가? 문제가 되는가? 아니, 문제가 될 리가 없지.
천선란
」
2019년 등단한 1993년생 소설가. 장편소설 〈천 개의 파랑〉 〈노 랜드〉, 연작소설 〈이끼숲〉을 펴냈다. 동식물이 주류가 되고 인간이 비주류가 되는 지구를 꿈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