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고 싶은 차가 생기면 어떻게 해야 할까
아내를 차에 태우고 길을 나선다. 서울 거리에는 실로 다양한 차들이 돌아다닌다. 그러다 내가 요즘 관심이 생긴 차를 만나면 모르는 척 물어본다. “저 차 어때?” 그러면 마치 준비된 것처럼 답이 튀어나온다. “두꺼비 같아.” 어디가 두꺼비 같다는 거지? 울컥 뜨거운 것이 명치에 얹히지만 굳이 되묻지 않는다. 그렇다면 그런 줄 알아야지. 그러고보니 두꺼비 같네. 펑퍼짐한 것이.
또 물어본다. “그럼 저 차는 어때?” “납작한 건 별로야.” 당장 사자고 한 것도 아닌데 완강한 거부 의사를 표시한다. 그래도 상처 받지 않는다. 가끔은 “그럭저럭 괜찮다”는 관대한 답이 나오기도 하니까.
한 번은 올림픽대로를 달리다 나도 모르게 감탄했다. 신음과 비명의 중간쯤 되는 의성어를 내뱉었을 때 아내가 눈을 번쩍 떴다. “왜? 이번엔 또 무슨 찬데?” “골프 바리안트. 이 차의 왜건 버전이라고.” “그래? 일 하는 사람이 타는 차 같은데?” “그게 무슨 말이야?” “트렁크에서 연장이 우르르 쏟아져 나올 거 같다고.” “…….” 이럴 때는 그냥 내렸던 차창을 가만히 올려버린다.
그렇대도 저 차가 무슨 모델이고 어떤 스토리가 있는지 변명할 필요가 없다. 하긴 그래. 당신 말이 옳아. 차가 그렇게 좋다면야 도로에서 이토록 희귀한 존재일 리 없겠지. 나는 공순히 물러선다.
무난한 차를 좋아하지 않는 나는 대체로 무난한 차를 사곤 했다. 명분이 뚜렷했다. 가정적인 남자니까 언제나 가족에게 좋은 차를 택했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남자들처럼 나 역시 다용도 패밀리카와 나의 로망을 동시에 차고에 넣어둘 여유를 갖지 못했다. 아마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그래도 꿈을 꿀 수는 있겠지. ‘인생은 모르는 거야.’ 혼잣말을 하면서라도 말이지.
취향이 달라도 아내와 맞설 필요는 없다. 특히 물건을 구입하는 데 있어서는 그렇다. ‘귀신과 엄마는 속일 수 없다’는 사실을 어릴 때 깨달은 나는 세상 모든 아내들의 결정이 남편의 그것보다 낫다는 것을 인정한다. 내 경우만 돌아봐도 그렇다. 아내가 선뜻 동의한 차는 절대 후회가 없었다. 이 말인즉 지금까지 탄 모든 내 차가 썩 만족스러웠다는 뜻이다. 미니밴도 그랬고, 몇 년 전까지 10년 동안 30만 킬로미터를 넘긴 해치백도 그랬으며 지금 타는 전기차 역시 매일 만족하며 탄다. 비밀은 간단하다. 일단 ‘우리 차’가 되면 모든 면을 수긍하기 때문이다. 심지어 돌덩이를 매단 것처럼 엉덩이가 통통 튀는 승차감마저 사랑스럽다 했다. 신기한 일이다.
더욱 다행인 것은 다음 차에 대한 합의를 미리 해두었다는 사실이다. 아내는 그 차가 처음 나올 때부터 예쁘다고 말했다.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두꺼비 같거나 납작하지 않다는 것은 확실하다. 어딜 봐도 내가 매력을 느낄 차는 전혀 아니었다. 중형 SUV. 세상 모든 쓸모와 무난함을 끌어 모은 차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분명한 건 이번에도 대만족할 거라는 사실에 안도한다.
이쯤에서 자백할까 한다. 그동안 나는 차에 관한 한 이상과 현실 사이에서 매번 타협했다고 떠들곤 했다. 자주 타협해야 원만한 부부관계가 가능하다고 믿으며 늘 그렇게 해왔다.
미국의 임상심리학자 폴 퀸네트는 책에 이런 말을 썼더라. “좋아하는 사람과 다투면서 지지 않는 사람이 있다면 미혼이거나 이혼한 사람이거나 곧 이혼당할 사람일 것이다. 가끔 져주자. 비기는 것조차 포기하자.” 이 조언을 굳건히 실천해왔다고 자부하는데, 늘 마음 속에서 조그마한 소리가 들린다.
“실은 한 번도 진 적이 없잖아.”
글·이경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