범위불안에서 벗어날 방법이 뭘까요. 더 큰 배터리? ‘꿈의 배터리’라는 전고체배터리? 아니면 배터리를 교체해주는 배터리 교환소? 이건 어떤가요. 달리기만 하면 무선으로 충전되는 ‘전기도로’.
미래 이야기냐고요? 아닙니다. 지금도 이스라엘이나 스웨덴, 독일, 노르웨이에 가면 볼 수 있습니다. 전기차 주도권을 되찾으려는 미국에선 무려 5개 주(미시건∙플로리다∙인디애나∙펜실베니아∙유타)에서 주정부가 이런 전기 고속도로를 깔겠다고 나섰죠. 현실로 다가온 ‘동적 무선충전(Dynamic wireless charging)’ 기술을 딥다이브해보겠습니다.
*이 기사는 6월 30일 발행한 딥다이브 뉴스레터의 온라인 기사 버전입니다. ‘읽다 보면 빠져드는 경제뉴스’ 딥다이브를 뉴스레터로 구독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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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속도로를 쌩쌩 달리는 전기차의 배터리를 무선으로 충전한다? 상당히 어려운 기술일 것 같지만 원리는 우리가 흔히 보는 핸드폰 무선충전과 같습니다. 구리 코일이 담긴 충전패드를 도로에 매립한 뒤 전류를 흘려주면 자기장이 형성되고요. 전기차 밑바닥에 달린 수신기가 이 자기 에너지를 받아서 배터리를 충전하는 겁니다. 중학교 과학시간에 코일과 자기장의 ‘오른손 법칙(오른손 네 손가락을 전류가 흐르는 방향으로 감으면 엄지손가락이 자기장의 방향)’ 배우셨죠? 바로 그 원리입니다.
무선이어도 충전 성능 일반 유선 충전기 못지않습니다. 업체마다 기술이 조금씩 다르지만 많게는 급속 충전기 수준의 200㎾ 출력도 낼 수 있다고 합니다. 충전 효율(투입하는 에너지 대비 실제 충전되는 비율)도 90% 수준이고요.
당장은 아니지만 이런 전기도로가 곳곳에 깔려있는 걸 상상해볼까요. 일단 운전자는 엄청 편해집니다. 충전을 신경 쓸 필요가 거의 없으니까요. 그냥 운행하면서 스마트폰 앱이나 차량 버튼으로 ‘충전하기’를 선택하면 알아서 충전이 이뤄집니다. 시간도 엄청 절약되겠죠.
전기차는 더 가볍고 저렴해질 수 있습니다. 지금처럼 1회 충전에 400㎞씩 달릴 수 있게 하기 위해 크고 무거운 배터리를 장착할 필요가 없으니까요. 배터리 시장의 패러다임이 바뀔 겁니다.
동적 무선충전 기술이 자율주행과 결합하면 한층 파워풀해집니다. 24시간 운행하는 자율주행 배송트럭이나 대중교통이 등장할 수 있죠. 물류 효율이 크게 높아질 겁니다.
물론 이런 이상향에 도달하기까지는 걸림돌이 한두개가 아닙니다. 동적 무선충전 사업을 진행 중인 해외 기업 관계자를 통해 이 점을 확인해봤습니다.
노르웨이 기업 ENRX는 얼마 전 미국 플로리다주의 4차선 고속도로에 설치할 무선충전 시스템을 수주했습니다. 올랜도 근처 516번 도로에 1마일(1.6㎞) 구간의 전기도로를 만드는 건데요. 리처드 반덴둘 ENRX 부사장과의 e-메일 인터뷰한 내용을 소개합니다(분량 때문에 실제 답변 내용을 일부 편집했습니다).
-동적 무선충전 시스템은 도로에 코일을 매립하는 방식인데요. 이 무선충전은 누가 이용할 수 있나요? 특수한 배터리가 장착된 전기차여야 하나요?
“수신패드가 장착된 전기차라면 모두 충전이 됩니다. 다양한 전력 요구사항을 가진 여러 유형의 전기차를 수용할 수 있죠. 동적 무선충전시스템은 승용차, 트럭, 버스 등 다양한 차량에서 활용될 때 특히 흥미롭고 비용 효율적입니다.”
현재는 전기차에 무선 충전을 위한 수신패드가 기본 장착돼있지 않기 때문에 운전자 입장에선 이 비용도 추가로 드는데요. ENRX는 수신패드 가격이 미정이라고 밝혔습니다. 참고로 외신에선 무선충전용 수신패드 설치 비용이 차량당 3000~4000달러일 거라고 추정한 적 있는데요. 고진석 ENRX 한국지사장은 “가격 충전 전력량에 따라 달라질 것”이라고 전합니다(전력량이 커질수록 비싸진다는 뜻).
-동적 무선충전의 가장 큰 장점은 뭘까요?
“운전자가 충전에 들이는 시간을 줄여서 전반적인 효율성을 개선한다는 겁니다. 충전 때문에 자주 정차할 필요 없이 장거리 여행을 할 수 있죠. 장거리 트럭 운송이나 대중교통에 있어 특히 중요한 점이고요. 오버헤드 전선과 전봇대, 플러그형 충전기가 필요 없기 때문에 도시 경관도 더 깨끗하고 아름답게 만들어줍니다.”
-무선충전 시스템은 너무 비싸지 않나요? 동적 무선충전이 널리 확산되는 걸 가로막는 장벽이 뭔가요.
“인프라 설치를 위해 상당한 선행투자가 필요한 건 사실입니다. 기존 인프라(도로)를 개조하는 데 드는 비용도 장벽이 될 수 있죠. 잠재적인 안전과 건강문제가 있기 때문에 이를 해결하려면 강력한 규제 프레임워크가 필요할 겁니다.”
ENRX가 이번에 수주한 플로리다 고속도로 관련 공사비가 무려 1360만 달러(약 176억원)라고 하는데요. 1마일 구간에 이 정도 비용이라면 엄청 비싸긴 합니다. 충전기 가격만이 아니라 도로를 파헤치고 전기를 끌어오는 공사비용이 상당하기 때문으로 추정되는데요. 물론 앞으로 기술이 발전하면 비용은 줄어들 수 있을 겁니다.
답변에서 지적한 안전과 건강문제도 관건인데요. 무선충전 과정에선 전자파가 발생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또 도로에 깔린 무선 충전 패드는 아스팔트 안에 매립돼 있어서 손상 위험이 적다고 하지만, 비나 눈에 얼마나 잘 견딜 수 있을지는 실제로 사용을 해봐야 알 수 있는데요.
이미 깔렸거나(예-스웨덴 고틀란드섬) 앞으로 건설될 예정인 전기도로 길이는 대체로 길어야 1마일(1.6㎞) 안팎에 그칩니다. 도로에 깔린 게 출력 200㎾의 급속 충전기라고 가정해도, 1마일이면 차량이 100초 만에 통과하기 때문에 실제 충전량은 5.5㎾ 정도(배터리를 10% 충전하는 수준)로 계산되는데요. 정말 충전 걱정 없이 장거리 고속도로를 달릴 수 있으려면 훨씬 더 많은 구간이 전기도로화 돼야 한다는 뜻이죠. 아마도 비용 효율성과 안전 문제에 대한 검증을 거친 뒤에야 그렇게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전기차 충전의 주류로 자리잡기까진 갈 길이 멀어보이긴 하지만, 동적 무선충전 시장이 열리기 시작한 건 틀림없어 보입니다. 유럽뿐 아니라 미국에서도 5개 주정부가 경쟁적으로 전기도로를 깔겠다고 나섰으니까요.
아직 초기이지만 이 시장에서 가장 앞서 나가는 건 이스라엘 기업 일렉트리온입니다. 퀄컴의 무선충전 사업부를 인수한 미국의 위트리시티도 유명하고요. 노르웨이 기업 ENRX는 후발주자이지만 인덕션에 쓰이던 자기유도기술을 전기차 무선충전에 적용하면서 이번에 큰 계약을 따냈는데요. 이쯤에서 이런 궁금증이 생길 겁니다. 한국 기업은 혹시 없나?
사실 동적 무선충전 기술에 있어 한국이 선도국이라 할 만합니다. 원천기술은 2007년 미국 매사추세츠공대(MIT)가 개발했지만 이를 2009년 세계 최초로 실용화해서 ‘온라인 전기자동차(OLEV)’를 만들어 낸 게 KAIST였거든요. 미국 주간지 타임이 ‘2010 세계 최고 발명 50’에 선정할 정도로 꽤 주목 받았던 기술이었습니다.
하지만 국내에선 투자비가 너무 많이 든다는 이유로 초기부터 시범사업에 반대하는 여론이 컸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무선충전은 물론 전기차도 생소했던 시절이거든요. 시범사업을 위한 전기버스를 완전히 새로 제작해야만 했는데요. 그 버스 한대 값이 5억~6억원이나 들었습니다. 서울대공원의 ‘코끼리 열차’와 구미시, 세종시의 전기버스 같은 시범사업을 벌였지만, 실제 상용화로 이어지진 못했죠.
그 사이에 이스라엘이 치고 나왔는데요. 정부가 예산을 투입해 2020년 텔아비브에 700m짜리 무선충전 도로를 깔고 전기버스를 운행함으로써 전 세계에 기술의 효율성을 입증해보였습니다. 마침 타이밍도 전기차 시대와 맞물렸죠. 이스라엘 스타트업인 일렉트리온이 해외 사업을 잇따라 수주하며 앞서나가게 된 배경입니다.
어찌 보면 한국은 너무 시대를 앞서갔던 건데요. OLEV 개발을 이끌었던 조동호 KAIST 전기전자공학부 교수는 이렇게 말합니다. “개발한 국가에서 검증되지 않은 기술을 다른 나라에선 쓰려고 하진 않거든요. 이스라엘이 우리보다 기술에서 앞서있다고 생각하진 않아요. 다만 우리와 달리 이스라엘은 실제 사업을 해본 경험이 있다는 레퍼런스를 가지고 시장을 선점하는 거죠.”
조 교수는 “신사업일수록 국가 차원에서 선도적으로 추진해야 하는 이유”라고 덧붙였는데요. 2018년 그가 설립한 와이파워원이라는 기업이 OLEV 기술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무선전력 분야 전문가의 의견도 들어봤는데요. 김남 충북대 정보통신공학부 교수는 “무선충전을 이용하면 배터리를 크게 줄일 수 있고 전기차 전환을 앞당기는 데도 도움이 된다”고 긍정적으로 평가합니다. “한국에 아직 기술이 남아있는 만큼, 지금이라도 대도시 버스전용 차로 같은 곳에 적용하는 걸 논의해 볼 만하다”는 제안인데요. 여러분은 어떻게 보실까요. 여전히 ‘주행 중 충전’ 시스템은 시기상조일까요, 아니면 이젠 어느 정도 때가 되었을까요. By.딥다이브
사실 ‘달리기만 하면 무선으로 충전이 되다니, 너무 편하고 좋겠다’는 생각으로 동적 무선충전 기술을 알아보기 시작했는데요. 대부분의 혁신적인 신기술이 그렇듯이 이 역시 광범위하게 확산되기까진 넘어야 할 현실적인 장벽이 적지 않아 보입니다. 주요 내용을 요약해드리자면
-전기차 운전자를 충전 걱정에서 해방시켜줄 수 있는 동적 무선충전 기술. 이를 적용한 ‘전기도로’가 이스라엘과 스웨덴, 독일, 노르웨이, 그리고 미국까지 곳곳에 깔리기 시작했습니다.
-충전을 위한 시간과 공간을 절약해줄 뿐 아니라, 트럭과 버스 같은 대형차도 아주 큰 배터리를 달지 않고 전기차로 만들 수 있다는 게 큰 장점. 하지만 막대한 초기 설비비용과 전자파로 인한 안전 문제가 걸림돌입니다.
-한국은 세계 최초로 주행 중 충전 기술을 실용화했는데요. 서울대공원 코끼리열차 수준의 소소한 시범사업에 그친 채 상용화하진 못했습니다. 그 사이 이스라엘 등 다른 나라 기업이 치고 나왔고요. 아직 기술은 남아있으니 한국도 이제 막 열린 이 시장에서 성과를 올릴 수 있을까요.
*이 기사는 6월 30일 발행한 딥다이브 뉴스레터의 온라인 기사 버전입니다. ‘읽다 보면 빠져드는 경제뉴스’ 딥다이브를 뉴스레터로 구독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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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애란 기자 haru@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