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온이 영하권으로 떨어지는 겨울철이면 전기차의 저온 주행 성능에 대한 우려가 커지기 마련이다. 배터리 방전은 물론이고 동력 장치에 써야 할 전력을 히터에 배분해야 하기 때문이다.
3열 대형 프리미엄 전기 스포츠유틸리티차량(SUV) 시대를 연 기아 ‘EV9’은 6월 출시 이후 처음으로 겨울을 맞이했다. EV9 구매를 고민하는 사람들에겐 이 혹한기에서 어떤 주행 성능을 보여줄지가 최대 관심사일 수밖에 없다.
환경부 무공해차 통합누리집에 따르면 2WD 20인치 기준 EV9의 저온에서의 1회 충전 주행거리는 상온(490km)의 약 76% 수준인 370km. 저온 주행거리는 에어컨을 틀지 않는 상온 측정 때와는 달리 히터를 최대로 사용해 EV9과 같은 큰 차일수록 상대적으로 손해를 볼 수밖에 없다.
그런데도 한 등급 아래 ‘EV6’(2WD 20인치)의 저온 주행거리가 상온의 92% 수준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EV9의 겨울철 전비(kWh당 주행거리) 효율 악화가 심각한 것 아니냐는 의구심이 생길 순 있다. 바깥 기온이 영하 10도 미만의 ‘북극 한파’가 불어닥친 22일, 실제 저온에서 EV9의 전비와 패밀리카로서의 실용성은 어떨지 약 80km 거리를 시승해봤다.
먼저 아파트 주차장(2.5m, 5.5m) 한 칸을 가득 메우는 크기를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EV9의 실내 공간은 운전자까지 승차 인원 5명이 넉넉하게 앉아도 될 정도로 넓었다. 밤 사이 장기간 주차로 차가워진 실내 공간을 영상 10도 이상으로 데우는 데에는 5분 정도가 걸렸다. 2∼3열에 가족을 태워야 하는 아빠 운전자들의 마음을 흡족하게 할 만한 포인트다.
넓은 실내 공간이 가져다주는 피로 상쇄 효과는 탁월했다. 머리 공간만 해도 좌석별로 성인 남성 손 하나 반이 들어갈 정도로 여유로웠다. 물을 마시거나 등받이 높이를 바꾸는 등 거주성(居住性) 측면에서 EV9은 최상위 모델로 손꼽힐 만했다. 특히 2시간이 넘어가는 장시간 운행에 EV9의 탁 트인 시야는 운전자의 부주의에 대한 각성과 함께 지루함을 깨는 ‘정서적 환기 효과’까지 제공했다.
차선 변경 시 큰 덩치답지 않게 경쾌한 가속감을 보여줄 땐 대형 전기차의 장점이 무엇인지 체감할 수 있었다. 식당 예약까지 시간이 남아 차에서 대기할 때도 무공해로 따뜻한 바람을 쐬며 편히 쉴 수 있는 최적의 셸터가 돼 주었다. 약간 물렁물렁한 승차감이나 부족한 차량 직진성(스티어링 휠 미조작 시에도 현 주행 방향을 유지하는 정도) 등 기계공학적 기준에서 아쉽다고 느껴질 만한 부분들을 모두 잊게 할 정도였다.
이렇게 타고 내리고 또 대기하면서 꼬박 5시간을 가족들과 EV9에서 보냈다. 계기판에 찍힌 평균 전비는 4.2km. EV9의 복합 도심 전비인 4.1∼4.7km 안에 들어갔다. 이번 주행에 20kWh 정도를 쓴 셈이니 비용(주택용 전력, 200kWh까지 kWh당 120원 기준)으로 치면 2400원을 쓴 셈이다. 한겨울에 이 정도 비용으로 이렇게 쾌적하고 따뜻한 공간을 찾긴 어려울 것이다.
EV9의 모델별 시작가는 에어 7337만 원, 어스 7816만 원이다. 최근 연말 재고 할인 등으로 EV9을 6000만 원대로 구입한 소비자들은 아마 마음만큼은 봄날일지도 모르겠다.
김재형 기자 monami@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