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백일상과 돌상에 빠지지 않던 음식이 있었다. 수수팥떡이다. 수수와 팥의 붉은 기운이 나쁜 운을 막아준다고 믿었다.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한 시루의 떡은 귀한 자리를 상징했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모습이 낯설다. 수수경단이나 수수부꾸미도 옛이야기 속 음식이 됐다.
수수를 외면하게 된 데엔 이유가 있다. 줄기가 질기고 키가 커서 기계 수확이 어렵다. 벼나 밀보다 수확량도 적다. 병해충에도 약하다. 노동력은 많이 드는데 수익은 낮다. 농가 입장에선 외면할 수밖에 없는 조건이다. 재배 면적은 줄었고, 자연스럽게 식탁에서도 멀어졌다.
농촌진흥청 자료에 따르면, 1938년 기준 북한 지역의 수수 재배면적은 6만4000헥타르였고, 평안도에서 특히 활발했다. 그러나 이후 점차 줄어 현재 남한 전체 재배 면적은 1500~2000헥타르 수준이며, 이마저도 국내 수요량을 충족하지 못해 수입 비중이 절반을 넘는다. 2008년 전체 공급량은 1만7664톤이었고, 이 중 85%가 수입에 의존했다. 수요의 67%는 식품 및 가공용, 32%는 사료용으로 쓰였다.
물론 완전히 사라진 건 아니다. 일부 지역에서는 여전히 수수를 기르고 있다. 전북 고창, 강원 영월, 경북 안동 같은 곳에서는 지금도 밭에서 수수가 자란다. 수수로 떡을 만들고 밥을 짓는 집은 드물지만, 다른 식재료로 바꿔 쓰는 경우가 늘고 있다. 밀가루를 줄이려는 사람들 사이에서 수수가 다시 쓰이고 있다. 글루텐이 없어 부담 없이 먹을 수 있고, 반죽 요리나 죽, 샐러드에 넣어 먹기 좋다. 직접 빵을 굽거나, 탄수화물을 조절하는 식단에서 수수를 고르는 경우도 많아졌다.
수수 재배는 계속된다

수수는 인류가 가장 오래 먹어온 곡물 중 하나다. 기원전 8000년경 아프리카 사하라 인근에서 채집됐고, 기원전 2000년 무렵부터 재배가 시작됐다. 지금도 전 세계에서 다섯 번째로 많이 재배된다. 인도, 수단, 나이지리아 등 건조한 기후의 나라에서 흔하다.
수수는 환경 변화에 강하다. 덥고 비가 적은 땅에서도 잘 자란다. 물 관리가 까다로운 시대, 대체 곡물로서 존재감이 다시 떠오른다. ‘기후 위기 시대의 생존 작물’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다.
활용도도 높다. 껍질째 씹는 통곡물, 속껍질을 제거한 펄드, 곱게 간 가루, 튀긴 팝콘형까지 다양하게 가공된다. 시럽으로도 만든다. 맛은 담백하고 고소하다. 씹을수록 단맛이 올라오고, 특유의 쫀득한 식감은 밥에도, 떡에도, 죽이나 과자에도 잘 어울린다.
인도에서는 수수가루로 로티를 구워 먹고, 아프리카에서는 죽처럼 끓여 주식으로 먹는다. 미국에서는 시리얼이나 파스타로 가공돼 식품 매장에서 판매된다.
건조한 땅에서도 자라는 수수의 생김새

수수는 형태적으로도 독특한 구조를 가지고 있다. 줄기는 곧게 서는 원통형으로, 품종에 따라 1m에서 3m까지 자란다. 마디 수는 8~13개이며 줄기 단면은 타원형이나 원형이다. 내부는 차 있고, 상처를 입으면 적갈색 색소가 형성된다. 잎은 총 22개 정도로 길이는 50~90cm, 너비는 8~12cm이며 중륵 색은 리그난 함량에 따라 다르다. 어린잎은 위로 서 있고 성숙하면서 점차 구부러진다. 왁스층이 줄기와 잎을 덮고 있으며, 잎 윗면에는 수분 손실을 줄이기 위한 기동세포가 있어 가뭄에 견딘다.
수수는 옥수수보다 절반 정도 적은 물로도 충분히 자란다. 뿌리는 네 가지 유형이 있다. 씨뿌리는 발아 직후 잠시 자라다 마르고, 부정근은 물과 영양분을 주로 흡수한다. 관근은 땅 표면에 가깝게 퍼져 수분을 끌어들이고, 버팀뿌리는 식물이 쓰러지지 않게 받쳐준다. 이런 뿌리 구조 덕분에 수수는 마른 땅에서도 잘 버틴다.
이삭은 품종에 따라 밀집하거나 퍼지는 형태로 나뉘며, 이삭 길이는 7.5~50cm, 폭은 220cm 정도다. 한 이삭에는 보통 800~3000알의 씨알이 열린다. 수수는 자가수분과 타가수분을 함께 한다. 평균 타가수분율은 6% 정도다. 바람에 의해 꽃가루가 날리고, 꽃가루는 1~5시간 이내에 수분해야 한다. 암술은 꽃이 핀 후 약 10일 동안 수분이 가능하다. 날씨가 습하면 수분이 잘 되지 않는다.
씨알은 보통 단단한 껍질로 싸여 있고, 크기나 색깔, 모양이 품종에 따라 다르다. 낟알 색은 흰색, 노란색, 갈색, 붉은색, 검정색 등이 있으며, 찰기 여부도 구별된다. 곡립 무게는 1000알 기준 25g 정도이며 비중은 1.29 내외다. 껍질은 외과피, 중과피, 내과피로 나뉘며, 중과피에 녹말입자가 존재할 경우 껍질이 두꺼워져 분쇄 시 색이 오염될 수 있다. 내과피에는 빈 세포가 있어 물을 흡수하는 역할을 하며, 그 안쪽의 씨껍질에는 탄닌 색소가 있어 씨앗의 색을 좌우한다. 껍질이 얇은 품종은 기계 도정에 적합하고, 두꺼운 품종은 손 절구로도 도정할 수 있다.
밀가루 대신 찾는 곡물

무엇보다 수수는 글루텐이 없다. 밀이나 보리에 민감한 사람도 부담 없이 먹을 수 있다. 밀가루를 피해야 하는 식단을 따를 때, 수수는 실용적인 대안이 된다. 수수 반 컵엔 식물성 단백질이 약 10g 들어 있다. 근육이나 피부, 내부 조직을 유지하는 데 꼭 필요한 양이다. 식이섬유는 약 6.5g 정도다. 잘 먹으면 속이 편해지고 몸도 가볍게 느껴진다.
단백질과 식이섬유가 많아 포만감이 오래간다. 과식을 줄이고, 당이 천천히 오르게 만들어준다. 혈당이 쉽게 올라가는 식사에 비해 부담이 덜하다. 수수에는 프리바이오틱스와 폴리페놀이 포함돼 있다. 장 속에서 살아야 할 균들이 잘 자라도록 환경을 만들어준다. 식이섬유가 많아 배변 활동도 원활해진다.
심장 쪽 문제를 줄이는 데도 도움을 준다. 수용성 섬유질이 장에서 콜레스테롤과 섞여 배출되면서 혈관에 지방이 쌓이지 않도록 도와준다. 아연, 셀레늄, 구리 같은 성분도 들어 있어 몸의 방어 체계에 필요한 조건을 채워준다. 뼈를 튼튼하게 만드는 데도 좋다. 마그네슘, 인, 칼륨이 들어 있어 칼슘, 비타민D와 함께 작용한다. 골밀도가 떨어지지 않도록 도와준다. 아이부터 어른까지 모두에게 필요한 성분이다.
수수를 직접 사려면 온라인 농산물 마켓이나 전통시장 건강식품 코너를 찾는 게 빠르다. 최근엔 대형마트 일부에서도 가루 형태로 판매된다. 반찬가게에서 수수밥 도시락을 취급하는 곳도 있다. 온라인 쇼핑몰에서는 수수를 이용한 그래놀라, 시리얼, 베이킹 믹스 제품도 쉽게 찾을 수 있다. 일부 간식 브랜드에서는 수수 에너지바를 출시하기도 했다. 팝콘형 제품도 꾸준히 인기를 얻고 있다.
수수로 만드는 ‘수수팥떡’ 레시피

낮기온이 제법 올라간 5월이다. 이런 때일수록 손수 만든 간단한 간식이 제격이다. 특히 집에서 쉽게 만들 수 있는 떡은 부담도 적고 정성은 가득 담을 수 있다. 오늘 소개할 ‘수수팥떡’은 아이들도 좋아하고 어른 입맛에도 잘 맞는 대표 간식이다. 수수팥떡은 수수 반죽 안에 팥고물을 묻혀 완성하는 간단한 방식이다. 겉은 쫀득하고 속은 고소하고 달다. 부재료도 많지 않다. 팥과 수숫가루, 찹쌀가루만 있으면 충분하다. 특별한 도구 없이 냄비와 체 정도만 준비하면 누구나 만들 수 있다.
■ 요리 재료
팥 500g, 수숫가루 200g, 찹쌀가루 200g, 설탕 60g, 소금 약간
■ 만드는 순서
1. 팥을 물에 2시간 이상 불린다.
2. 불린 팥을 물에 넣고 끓인다. 끓어오르면 첫 물은 버린다.
3. 다시 물을 부어 중불에서 팥이 으깨질 때까지 푹 삶는다.
4. 익은 팥에 설탕 60g과 소금 약간을 넣고 으깬다. 팥고물 완성.
5. 수숫가루 200g과 찹쌀가루 200g을 섞고 따뜻한 물을 조금씩 부어가며 반죽한다.
6. 반죽이 되직해지면 동그랗게 빚는다.
7. 끓는 물에 넣고 경단이 떠오를 때까지 삶는다.
8. 익은 경단을 찬물에 넣어 식히고, 체에 밭쳐 물기를 뺀다.
9. 팥고물에 경단을 굴려 마무리한다.
팥은 반드시 한 번 끓인 물은 버려야 쓴맛이 사라진다. 반죽은 따뜻한 물을 조금씩 넣으며 조절해야 질어지지 않는다. 익힌 떡은 찬물에 담가야 표면이 쫀득해진다. 팥은 상하기 쉬우므로 당일 먹을 양만 남기고 나머지는 냉동 보관한다. 작은 크기로 만들면 아이들이 먹기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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