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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이 오는 소리 알밤 익어가는 소리

넓이와 높이보다

내게 깊이를 주소서

나의 눈물에 해당하는…

산비탈과 먼 집들에 불을 피우시고

가까운 곳에서 나를 배회하게 하소서.

나의 공허를 위하여

오늘은 저 황금빛 열매를 마저 그 자리를

떠나게 하소서

당신께서 내게 약속하신 시간이 이르렀습니다….김현승

지난 여름은 무지 무더웠습니다.

언론에서는 더위와 견디는 사람들의 동정을 보도하고,

더러는 더위에 쓰러진 안타까운 사연도 전해주었습니다.

입추, 처서

예전 같으면 모기입이 비뚤어진다는 처서 절기가 지나도

열대야는 끝모를 행진을 이어가기에 밤을 뒤척이기 일쑤였습니다.

그러고도 한 스무날은 지났을 것 같은데 그저깨부터 부쩍 아침 바람이 선선해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리하여 이른 아침 잠에서 깨어나자 마자 뒷산을 올랐습니다.

그곳에 그리도 오기 싫었을 가을이 오는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습니다.

토실토실 알밤이 익어가기 시작했으니까요

가을이 오는 소리를 찾아서 떠난 산책길에 알밤 익어가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으니

아침부터 횡재했습니다.

김현승 시인은 ‘가을의 시’에서

넓이와 높이보다

내게 깊이를 주소서

나의 눈물에 해당하는…

산비탈과 먼 집들에 불을 피우시고

가까운 곳에서 나를 배회하게 하소서.

라고 낮은 목소리로 기도를 합니다.

천상 아침부터 가을이 오는 소리를 찾아 뒷산을 배회하는 내 모습과 오버랩되며

시인의 글 한줄을 음미하듯이 읽어 내려갑니다.

가을은 분명 나의 눈물에 해당하는 넓이와 높이보다 내게 깊이를 요구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지난 여름의 뜨거움에 몸을 숨길 곳을 찾아 헤메야만 했던 뒷산 다람쥐, 청솔모, 두더지를 생각하면,

가을은 분명 서늘한 기온을 품고 빨리 찾아와야만 합니다.

가을이 오는 소리는 가을 꽃에서도 들려오기 시작합니다.

가을이 오면 알밤이 익듯이 대추도 붉어지기 시작합니다.

장석주 시인은 대추 한 알이라는 시에서 이렇게 노래합니다.

‘저게 저절로 붉어질 리는 없다

저 안에 태풍 몇 개 저 안에 천둥 몇 개 저 안에 벼락 몇 개 저 안에 번개 몇 개가 들어서서 붉게 익히는 것일게다’

이제 저 만치서 나락 익어가는 소리도 들려오겠죠.

추수한 나락 가마니를 실은 황소를 몰며

동구밖을 돌아오는 어르신들의 풍경은 만날 수 없는 시절이 되었지만

그래도 가을이 오는 소리를 찾아 뒷산으로 올랐다가

알밤 익어가는 소리도 들었으니 오늘 하루도 힘차게 열어봐야 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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