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년 만의 귀환, 거장은 늙지 않았다 – 이창동과 <가능한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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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 베네치아 리도섬, 살라 그란데 극장. 엔딩 크레디트가 올라가고 불이 켜지자 객석은 일어섰습니다. 6분간 이어진 기립박수 속에서 배우 설경구와 조인성은 눈물을 훔쳤고, 전도연과 조여정은 서로를 끌어안았습니다. 그 자리에 서 있던 한 사람, 이창동. 2002년 ‘오아시스’로 이 도시에서 은사자상을 받은 지 24년 만이었습니다.
한 감독이 8년간 침묵했습니다. 그리고 돌아온 자리에서, 세계는 다시 그의 이름 앞에 멈춰 섰습니다.
침묵이 만든 질문
‘버닝’ 이후 8년. 이창동은 그 시간 동안 스스로에게 물었다고 합니다. “영화가 여전히 사람과 사람을 이어줄 수 있는가.” 이 질문 하나를 들고 그는 ‘가능한 사랑’을 완성했습니다.
그 완성까지 가는 길이 순탄했던 것만은 아닙니다. 완성도에 대한 기대에도 불구하고 국내 투자자들은 상업성을 이유로 선뜻 나서지 못했고, 결국 제작사는 넷플릭스와 손을 잡았습니다. 넷플릭스 오리지널이라는 조건 때문에 칸영화제 출품 자체가 원천적으로 막혔던 것도 이 때문입니다. 거장의 신작에도 선뜻 투자하지 못하는 국내 영화 산업의 현실을 보여주는 대목입니다. 그럼에도 이창동은 베니스에서 이 모든 우려를 뒤집어 놓았습니다.
대규모 정리해고로 일자리를 잃은 노동자 호석과 그의 아내 미옥. 그들의 삶을 다큐멘터리로 담으려는 감독 예지와 그녀의 부유한 남편 상우. 서로 다른 계급에서 온 두 부부가 만나 마주하는 것은 카메라 너머의 진실이 아니라, 자신들도 몰랐던 감춰진 욕망과 균열입니다.
이 설정 자체가 이미 이창동입니다. 그는 언제나 도저히 서로를 이해할 수 없는 두 세계를 충돌시켜 왔습니다.
‘초록물고기’의 조폭과 가족
‘오아시스’의 비장애인과 장애인
‘밀양’의 신앙과 세속
‘버닝’의 가진 자와 못 가진 자.
이번엔 그 경계선이 계급으로, 그리고 ‘관찰하는 자’와 ‘관찰당하는 자’의 구도로 다시 그어졌습니다. 카메라가 타인의 고통을 다룰 자격이 있는가? 창작의 윤리를 창작 안에 되묻는 것 역시 ‘시’에서부터 이어져 온 이창동의 오랜 습관입니다.
세계가 보낸 찬사
말이 필요 없을 정도의 반응이었습니다.
로튼토마토 신선도 지수 100%, 메타크리틱 96점. 데드라인은 이번 영화제에서 가장 고르게 찬사를 받은 작품이라 평했고,
인디와이어는 최고 등급 A를 부여하며 계층 간 마찰이 빚어내는 긴장감이 장면마다 흐르는 걸작이라는 평가를 내놓았습니다.
할리우드리포터는 트라우마와 존엄성의 상실, 그리움, 계급적 질투에 대한 성찰이 깊게 배어 있는 슬프지만 아름다운 실내극이라 평했고,
가디언의 피터 브래드쇼는 별 다섯 개 만점에 네 개를 주며 정교하게 균형 잡힌 연출과 지적인 풍요로움을 높이 샀습니다.
벌처는 시대를 초월해 오래 남을 영화라는 평가를 내놓았습니다.
배우들의 연기 역시 나란히 찬사를 받았습니다. 타임은 설경구의 연기를 영화 전체를 뛰게 하는 고통스러운 심장에 비유했고,
인디와이어는 전도연을 향해 백 년에 한 번 나올 법한 연기라는 평가를 내놓았습니다.
한국 영화가 베니스영화제 경쟁 부문에 초청된 것은 이번이 통산 12번째, 지난해 박찬욱의 ‘어쩔수가없다’에 이어 2년 연속입니다.
그리고 지금, 21편의 경쟁작 중에서도 ‘가능한 사랑’은 황금사자상에 가장 가까이 서 있는 이름으로 거론되고 있습니다.
왜 우리는 이 이름 앞에 멈추는가
이창동은 다작하는 감독이 아닙니다. 서른 해에 가까운 시간 동안 그가 내놓은 장편은 ‘가능한 사랑’ 이전까지 겨우 여섯 편. 그러나 그 여섯 편 각각이 한국 영화사의 이정표로 남아 있다는 사실이야말로 그가 왜 거장으로 불리는지를 말해줍니다.
그는 소설가로 먼저 문장을 익힌 사람입니다. 그래서 그의 영화는 설명하지 않습니다.
대사보다 침묵으로, 사건보다 여백으로 인물의 내면을 드러냅니다. ‘박하사탕’은 시간을 거꾸로 돌려 한 인간의 파멸을 한국 현대사와 포갰고, ‘오아시스’는 세상이 외면한 사랑을 정면으로 응시했습니다. ‘밀양’은 전도연에게 칸의 여왕관을 씌웠고, ‘시’는 언어를 잃어가는 한 노년 여성을 통해 시라는 예술 그 자체를 다시 물었습니다. ‘버닝’은 청년 세대의 계급적 절망을 스크린 인터내셔널 평점 역대 최고치로 세계에 증명해 보였습니다. 그리고 이번 ‘가능한 사랑’은 그가 내놓는 일곱 번째 장편입니다.
이 모든 작품이 공유하는 것은 사회적 약자와 고통을 미화하지 않고 정직하게 응시하는 태도입니다. 그는 관객을 위로하지 않습니다. 대신 질문을 남깁니다. 그리고 그 질문은 언제나 스크린 밖, 우리 각자의 삶으로 되돌아옵니다.
노무현 정부의 초대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을 지낸 이력도 그의 위상에 다른 층위를 더합니다. 예술가로서만이 아니라, 한국 사회와 문화를 향한 발언권을 가진 인물로서 그는 오랫동안 존경받아 왔습니다.
다시, 가능한 사랑
이번 작품에서 눈에 띄는 변화가 있다면, 사회 구조를 향했던 날카로운 시선이 이제는 인간관계 그 자체의 회복 가능성을 향해 있다는 점입니다. 파국도 구원도 아닌, 애매하고 여운이 남는 결말 – 이창동다운 그 방식은 여전하지만, 그 안에 담긴 질문은 한층 더 근원적입니다. 우리는 여전히 서로를 이어갈 수 있는가.
8년의 침묵 끝에 이창동이 내놓은 답은, 제목 그대로 ‘가능한 사랑’이었습니다.
그리고 지금, 베네치아의 밤은 그 답에 기립박수로 화답하고 있습니다.
작성자 로더리고
사진 및 움짤 출처 구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