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르보이스] 가족이 포스트잇이라면

154

나는 가족을 다룬 다큐멘터리영화로 데뷔했다. 하나둘 결혼하는 친구들이 부럽고 질투 나서 영화를 만들기 시작했는데, 영화를 다 만들 때쯤 알았다. 내가 원하는 건 그저 지금을 함께할 수 있는 작은 공동체라는 걸. 혹시 언젠가 우리가 흩어진다 해도 말이다.

우리 집, 내가 살고 있는 패밀리 하우스에는 인간 셋과 고양이 둘이 살아간다. 우리 셋은 룸메1을 주축으로 한 친구 사이고, 고양이들은 인간의 결정에 따라 벼락 같은 합사를 했다. 모두 같이 산 지는 1년쯤. 집은 오래된 빌라 2층이지만 주소는 301호이고, 방 두 개와 거실, 화장실을 갖췄다. 방이 두 개라 인간들은 방을 나눠 쓰고 고양이는 지들 가고 싶은 곳에 맘대로 가며 지낸다

룸메1은 독립영화 PD이자 이 집의 주인이다. 이사가 싫어서 이 집을 샀고, 여태껏 살아본 가장 작은 집이라고 했다. 아주 마음에 들어 하지 않지만, 지켜본 바에 의하면 이 집에 대한 애정이 깊다. 룸메2는 대구에서 온 방송작가다. 서울에 일자리를 얻어서 왔다가 이 집에서 함께 살게 됐다. 나는 초등학교 교사이자 다큐멘터리 창작자다. 나와 룸메2는 룸메1에게 매달 월세를 낸다. 가스와 전기, 수도 요금을 함께 내는 생활비 통장이 있다. 한 달에 5만 원씩 넣어 함께 쓰는데, 식비로도 모자라 월말이 되면 돈을 더 걷곤 한다. 그 누구도 걷는 금액을 늘리자는 말은 안 한다.

우리는 자주 집 앞 반찬 마트에서 고사리와 무생채, 궁채나물과 숙주, 연근무침 같은 반찬을 구입해 양푼에 넣고 쌀밥과 고추장, 참기름을 둘러 숟가락만 들고 나눠 먹는다. 그러면 진짜 한 식구가 된 것 같아 괜히 애틋해진다. 가끔 힘이 좀 남는 날에는 맛있는 걸 만들어 먹기도 한다. 우리는 가족회의도 하지 않고, 집 안 규칙도 없고, 겨우 만든 생활비 통장은 잘 쓰지도 않는다. 함께 잘 살기 위해 많이 계획하는 것의 대부분이 우리에겐 없다. 그냥 어울려 살아간다. 마음에 과거를 쌓아두지도, 미래를 계획하지도 않고 매일을 산다. 이 관계를 가족이라고 부를 수 있는지. 누군가 가족이라고 부른다면 “그래 맞아” 하겠지만, 내가 먼저 “우린 가족이야” 할 수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혈연 가족을 가족이라 부르는 건 언제나 쉽다. 그렇지만 그 이외의 다른 관계를 가족이라 부르는 건 늘 조심스럽다. 그것이 우리가 굳이 가족일 필요가 없어서인지, 아니면 차마 가족이라는 것이 침범하기 어려운 영역으로 남아 있기 때문인지는 모르겠다. 가족이 무엇인지 제대로 답할 자신도 없으면서 나는 가족이 갖고 싶었다. 늘 무서운 존재였던 엄마와 늘 자리에 없었던 아빠 그리고 일가친척들의 온갖 사연과 불화는 나를 훌쩍 떠나고 싶게 만들었다. 부모와 사이가 좋은, 그들을 사랑할 수 있는 사람들을 보면 부러웠다. 나는 늘 나를 만든 세계로부터 도망가 새로운 곳에서 다시 시작하고 싶었으니까.

나는 어쩌면 친구들과 가족이 돼 사는 것에 환상을 품었는지도 모른다. 아주 친밀하고 모든 것을 이해받고 같이 살림을 꾸리는 것에 대해 말이다. 먹는 것, 입는 것, 사는 것 그리고 감정과 관계의 고달픔을 나누고 잠시 내려놓을 누군가가 있는 것을 꿈꿨다. 함께 산다는 건 서로를 믿고 돌보겠다는 선언을 한 사이나 마찬가지다. 하지만 현실은 끝없는 집안일, 명확할 수 없는 역할 분배로 인한 필연적 눈치 보기, 서로 다른 생활습관으로 인한 갈등, 모든 것을 함께해도 결국 집은 한 명이 소유한다는 데서 오는 불안감이기도 했다. 그러니 아마도 누군가에겐 우리의 삶이 위태로워 보일지도 모른다. 친구와 모여 사는 지금은 한때 잠깐일 것이라고, 시간이 흐르면 곧 다른 모습으로 안정될 것이라 단정할지도 모른다. 사실 이렇게 속삭이는 건 나 자신이다. 나는 여전히 묻는다. 우리가 가족일 수 있을까.

여기까지 적고 나니 영화를 찍을 때가 생각난다. 가족의 정의를 넘어 함께 가족이 된 사람들의 이야기를 수집하기 위해 섭외한 인터뷰이와의 대화. ‘친구들과 함께 모여 가족이 되었다’는 소제목을 떠올리며 약속 시간에 맞춰 그들을 인터뷰하러 갔다. 그들의 집에서 음료를 나눠 마시고, 카메라를 설치하고, 담소를 나누고 본격적으로 인터뷰에 들어가려는 순간이었다. 좀 더 묵직한 이야기로 넘어가기 전, 가볍게 짚고 넘어가려는 질문에 예상치 못한 대답이 날아왔다. “가족이라는 말로 저희 관계를 설명하고 싶지 않아요.” 오 마이 갓. 가족이 아니면 뭔데! 여러분이야말로 이 시대의 새로운 가족이잖아! 내 영화 어떡하지? 그렇게 정신없이 진행된 인터뷰는 처음이었고, 엄청난 시간을 소요한 끝에 잘 마무리되긴 했다.

그날 주고받은 이야기를 두고두고 생각했다. 많은 사람이 가족을 초강력 ‘쓰리엠 접착 테이프’로 생각한다고. 그동안 사회와 국가가 부담해야 할 많은 과업을 가족에게 떠넘겨왔으니 당연히 가족이 무겁고 튼튼해야 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시절은 갈 것이고, 가야 한다. 그래서 나는 꿈꾼다. 가족이 포스트잇과 같기를. 떼었다 붙였다 할 수 있는, 그게 그 자체의 매력인 포스트잇. 서로를 강하게 붙잡기보다 가볍게 붙어 있어주는 존재로서의 가족. 오라! 포스트잇의 시대여.


이강희

영화감독이자 글 쓰는 사람. 농촌과 지방 소도시를 거쳐 서울에 거주 중이다. 삶을 굴러가게 하는 것에 관심이 많다. 다큐멘터리 〈모든 가족은 퀴어하다〉를 연출했다.

이 기사에 대해 공감해주세요!
+1
0
+1
0
+1
0
+1
0
+1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