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징어 게임’·’기생충’이 ‘패스트 라이브즈’의 오스카행 밀었다
“자막이라는 1인치의 장벽을 뛰어넘으면 더 많은 영화를 즐길 수 있다.”
지난 2020년 ‘기생충’으로 비영어권 영화 처음으로 작품상과 감독상 등을 거머쥐며 미국 아카데미상 4관왕을 차지한 봉준호 감독이 남긴 말이다. 영화 속 대사로 표현되는 다양한 언어의 장벽을 뛰어넘으면 그만큼 보편성을 지닌 다양한 영화를 더 재미있게 들여다볼 수 있다는 의미이다. 특히 전 세계 영화시장에 막강한 영향력을 발휘해온 할리우드 영화의 언어, 즉 영어가 아닌 또 다른 나라의 언어가 영화를 즐기는 데 더 이상 장벽이 될 수 없다는 뜻이기도 하다.
이를 입증하듯 올해 비영어권 영화가 대거 미국 아카데미상 후보에 오르는 등 힘을 발휘하고 있다. 최근 영국 BBC는 이 같은 현상을 분석하며 몇 가지 배경을 설명했다. 그 가운데에는 한국시리즈 ‘오징어 게임’의 역할도 있었다고 보도해 눈길을 끈다.
올해 아카데미상 후보에는 한국계 셀린 송 감독이 한국어 대사 위주로 연출한 ‘패스트 라이브즈’를 비롯해 프랑스영화 ‘추락의 해부’, 스페인영화 ‘안데스 설원의 생존자들’, 영국에서 독일어로 제작된 ‘더 존 오브 인터레스트(The Zone of Interest)’ 등 비영어권 영화가 잇따라 지명됐다.
‘추락의 해부’는 작품상과 감독상, 각본상 등 4개 부문에, ‘패스트 라이브즈’ 역시 감독상과 각본상 부문에 각각 노미네이트됐다. ‘더 존 오브 인터레스트’도 작품상과 감독상, 국제장편영화상(옛 외국어영화상) 등 4개 부문의 후보가 됐다.
비영어권 영화가 주로 국제장편영화상 부문에서만 후보가 됐던 불과 몇 년 전과 비교해도 뚜렷한 흐름이다. BBC는 이를 “아카데미상의 96년 역사의 새로운 기록”이라고 썼다.
BBC는 이 같은 현상이 보수적인 백인문화 등 다양성을 잃은 미국 아카데미상에 대해 2010년대 중반 이후 현지에서 강한 반발이 일었던 것에서 요인을 찾았다. BBC는 “2015년 활동가이자 작가인 에이프릴 레인이 아카데미가 영화업계 전반에 걸쳐 유색인종의 업적을 인정하지 않는 것에 항의하기 위해 시작한 #(OscarsSoWhite 캠페인”을 가리켰다.
매체는 할리우드 연구자인 마이클 슐먼 작가를 인용해 “그 이후 아카데미는 회원을 다양화하고 확장하기 위해 엄청난 노력을 기울였다”면서 “더 많은 여성과 유색인종, 젊은 유권자들을 끌어들여 훨씬 더 글로벌해졌다”고 평가했다. 아카데미상 수상자(작)을 결정하는 미국 영화예술과학아카데미의 회원이자 유권자가 전 세계적으로 늘어났다는 것이다.
이와 함께 넷플릭스 등 스트리밍 플랫폼의 역할을 꼽았다.
실제로 2022년 아카데미 작품상 등 9개 부문에 후보로 올랐던 독일의 ‘서부전선 이상 없다’와 올해 ‘안데스 설원의 생존자들’ 등이 넷플릭스의 오리지널 영화이다.
마이클 슐먼은 “시청자들이 더 이상 독일어 영화를 보기 위해 아트하우스 영화관에 갈 필요가 없다”면서 “작품이 오스카 후보에 오르면 관객의 관심이 높아진다”며 아카데미상과 대중성의 상관관계를 설명했다.
“미국인들이 일반적으로 그 어느 때보다 자막이 있는 영화와 TV프로그램을 더 많이 받아들인다”는 뉴욕타임즈 칼럼니스트 카일 뷰캐넌의 언급 역시 마찬가지다.
특히 카일 뷰캐넌은 넷플릭스의 또 다른 히트작인 ‘오징어 게임’을 “비영어권 작품에 대한 미국인들의 관심이 커지고 있다는 증거”로 꼽았다.
그는 ‘오징어 게임’과 ‘기생충’ 등 “획기적인 글로벌 히트작들은 이런 과정을 가속화하며, 스트리밍 서비스로 전환은 풍부한 국제적 콘텐츠에 예전보다 훨씬 더 쉽게 접근할 수 있게 해주었다”고 분석했다.
또 ‘기생충’의 아카데미 작품상 수상이 결정적이기도 했다고 BBC는 보도했다. 마이클 슐먼은 ‘기생충’이 “최고의 그림이 어떤 모습인지, 어떤 언어로 표현할 수 있는지에 대한 인식을 바꿔놓았다. 그것이 진정한 변화였다”고 의견을 드러냈다.
BBC는 이 같은 요인 덕분에 “앞으로 몇 년 동안 주요 시상식에서 전 세계적 히트작이 계속 늘 증가할 것이다”면서 “아카데미는 자막의 1인치 장벽을 넘어섰다”고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