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자 갈 수 없다” AIIB 초대 총재가 말한 다자주의의 생존법
FORTUNE Korea 조회수
![[사진=셔터스톡]](https://www.fortunekorea.co.kr/news/photo/202512/51031_44794_21.jpg)
중국이 세계은행(World Bank)에 맞설 새로운 다자개발은행을 만들기로 했을 때, 설계자로 낙점한 인물이 진리췬(Jin Liqun)이었다. 그는 세계은행, 아시아개발은행(Asian Development Bank·ADB), 중국 재정부, 중국의 국부펀드인 중국투자공사(China Investment Corporation·CIC)를 두루 거친 베테랑 금융관료였기 때문이다.
2014년 이후 진리췬은 아시아인프라투자은행(Asian Infrastructure Investment Bank·AIIB)의 ‘얼굴’이었다. 2016년 초대 총재로 취임해 10년 동안 은행을 이끌었다. 그의 임기는 1월 16일에 끝난다. 그는 재정부 부부장(차관급)을 지낸 저우자이(Zou Jiayi)에게 총재직을 넘긴다.
진리췬이 AIIB를 맡았던 10년 전만 해도 세계는 더 큰 세계화와 통합으로 가는 흐름이 강했다. 미국과 중국은 경쟁자였지만 ‘적대적 라이벌’로까지 굳어지진 않았다.
지금은 다르다. 보호무역이 돌아왔다. 다자주의를 밀어내려는 움직임도 커졌다. 미·중은 정면으로 맞서는 국면이 됐다.
그럼에도 AIIB는 100개가 넘는 회원국을 대체로 유지해 왔다. 독일(Germany), 프랑스(France), 영국(U.K.)처럼 미국의 핵심 동맹도 포함돼 있다. 인도(India), 필리핀(Philippines)처럼 베이징과 오랜 긴장을 안고 있는 나라들도 회원으로 남아 있다.
하지만 질문은 남는다. 중국이 최대 주주인 AIIB가, 더 양극화된 국제 환경에서도 ‘중립’을 지킬 수 있을까. 중국이 자신을 ‘책임 있는 이해당사자(responsible stakeholder)’로 보이려는 전략과 가까이 맞물린 이 은행이 정치와 거리를 둘 수 있을까. 워싱턴이 ‘미국 우선(America First)’으로 움직이는 상황에서 다자주의는 살아남을 수 있을까.
세계은행과 ADB, 그리고 AIIB까지 다자기구에서 수십 년을 보낸 진리췬은 여전히 다자주의 신봉자다. 그는 글로벌 거버넌스의 전망도 긍정적으로 본다.
그는 포춘(Fortune)과의 인터뷰에서 “혼자 갈 수 있다는 발상을 이해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어떤 나라가 중국과 협력하기로 하면 무역과 국경 간 투자 같은 의제를 협상해야 한다. 그런데 기본을 이해하지 못하고, 널리 받아들여진 규칙을 따르지 않으면서 어떻게 협상이 되겠느냐는 것이다. 그는 “다자주의는 결코 피할 수 없는 것”이라고 했다.
베이징은 2016년 1월 16일 AIIB를 출범시켰다. 뿌리는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로 올라간다. 중국 당국은 불어난 외환보유액을 어떻게 쓰는 게 최선인지 고민했다. 동시에 국제통화기금(International Monetary Fund·IMF)과 세계은행 같은 핵심 국제 경제기구에서 중국의 영향력이 기대만큼 크지 않다고 불만을 드러내고 있었다.
경제 규모는 세계 최상위권으로 커졌는데, 의사결정 구조는 그 속도를 따라오지 못한다는 인식이었다.
AIIB의 자산은 최근 재무제표 기준 660억 달러다. 미국 주도의 경쟁 기구인 세계은행 4110억 달러, 아시아개발은행 1300억 달러보다 작다.
그래도 AIIB는 중국이 처음으로 ‘글로벌 거버넌스용 제도’를 직접 설계해 개발금융의 리더로 이름을 올리려는 실험이었다.
은행 설립 협상은 2014년 본격화했다. 인도와 인도네시아(Indonesia) 같은 아시아 주요국이 새 기구에 회원으로 참여하기로 하면서 속도가 났다.
2015년 초에는 영국이 AIIB 가입을 결정해 파장을 일으켰다. 프랑스, 독일, 호주(Australia), 캐나다(Canada) 등 다른 서방국도 뒤따랐다.
다만 두 경제 대국은 빠졌다. 오바마(Barack Obama) 행정부 시절 미국은 지배구조와 환경 안전장치가 ‘높은 기준(high standards)’을 충족할 수 있는지 우려한다며 가입하지 않았다. 동아시아에서 미국의 최측근 안보 동맹인 일본(Japan)도 불참을 택했다. 표면적 이유는 인권과 환경 보호, 부채 문제에 대한 우려였다.
진리췬은 “가입하지 않기로 한 선택을 우리도 개의치 않는다”고 했다. 대신 미국의 금융기관과 규제 당국, 일본 기업들과는 매우 긴밀한 협력 관계를 유지해 왔다고 말했다. 그는 이것이 AIIB가 중립적이고 비정치적이라는 증거라고 본다.
흥미로운 대목은 AIIB 출범 전후의 기류다. 당시 미국은 중국에 ‘책임 있는 이해당사자’가 되라고 오랜 기간 요구해 왔다.
2005년 미국 국무장관이던 로버트 졸릭(Robert Zoellick)은 이를 “국제 체제가 자국의 평화와 번영을 지탱한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그 체제를 유지하는 쪽으로 행동하는 나라”라고 정의했다.
20년이 흐른 지금, 일부 미국 당국자들은 중국의 글로벌 거버넌스 참여를 ‘위협’으로 본다. 베이징이 국제기구를 자국 이익에 맞게 비틀려 한다는 의심이다.
진리췬은 그런 비판을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그는 “중국은 유엔(United Nations) 기여금 기준 2위 기여국이고, 세계은행과 ADB에도 가장 큰 기여국 중 하나”라고 말했다.
그러면서도 중국의 1인당 국내총생산(GDP)은 여전히 여러 나라보다 낮다고 했다. 그럼에도 부담을 짊어지는 행태 자체가 책임을 떠안고 있다는 신호라는 주장이다.
그는 최근 여러 나라가 글로벌 거버넌스에서 발을 빼는 현실을 거론하며 “중국에게 책임을 설교하던 이들이 오히려 위선적”이라고도 했다.
“누군가에게 ‘책임 있는 구성원이 되라’고 말하려면, 먼저 자신이 책임 있는 사람인지 돌아봐야 한다”는 식이다.
베이징은 출범 때부터 AIIB를 세계은행과 ADB와 구별하려 했다. 핵심 키워드는 인프라였다. 진리췬은 인프라 투자가 중국의 후속 성장에 토대를 놓았다고 본다. 그는 “1980년 중국에는 고속도로도, 전철화 철도도, 현대식 공항도 없었다”면서 “그런데 1995년 무렵 경제가 이륙하기 시작했고, 1995년 이후 제조업과 가공업 같은 다른 부문이 기본 인프라 덕분에 폭발적으로 성장했다”는 설명이다.
그는 AIIB를 세계은행과 ADB의 경쟁자로 보지 않는다. 두 기구에서 일한 경험이 있어 ‘깊은 애착’이 있다고도 했다.
그는 “두 기관은 아시아와 전 세계 많은 나라에 엄청난 기여를 했다”고 평가했다. 다만 시대가 바뀌었다고 본다. 새로운 도전에는 더 비용 효율적으로 사업을 하고, 더 빠르게 대응하는 ‘새로운 무언가’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는 AIIB의 제도 설계 가운데 특히 ‘비상주 이사회(non-resident board)’를 방어하는 데 공을 들였다. 이사회 구성원들이 베이징 본부에 상주하지 않는 구조다. 출범 당시에는 투명성이 낮아지고, 이사들이 현안을 충분히 파악하기 어려워질 수 있다는 우려가 있었다.
진리췬은 반대로 봤다. 경영진에게 책임을 묻고, 이사회가 감독과 방향 제시라는 본연의 권한을 제대로 행사하려면, 일상 운영에는 손을 떼야 한다는 논리다.
이사회가 정책을 결정하고 개별 프로젝트까지 승인하는 구조가 되면 경영진은 책임질 여지가 사라진다는 것이다.
그는 이를 민간 부문에서 배운 교훈이라고 했다. ‘진짜 주인’인 이사회는 일상 경영에 개입하지 않아야 경영진을 책임지게 만들 수 있다는 논리다. 그는 “CEO가 일을 잘하면 계속 가게 하면 되고, 못하면 내보내면 된다”고 했다.
진리췬은 중화인민공화국이 공식 수립되기 몇 달 전인 1949년에 태어났다. 문화대혁명(Cultural Revolution) 시기에는 농촌으로 내려가 10년을 보냈다. 처음에는 농사를 지었고, 이후에는 교사가 됐다.
1978년 다시 고등교육으로 복귀했다. 베이징외국어대학(Beijing Foreign Studies University)에서 영문학 석사 학위를 받았다.
이후 그는 중국과 국제 금융기관을 오가며 경력을 쌓았다. 세계은행, ADB, 중국 재정부, 중국국제금융공사(China International Capital Corporation·CICC), 그리고 국부펀드 CIC까지 거쳤다.
2014년 그는 AIIB 설립 준비 기구를 맡았다. 2016년에는 AIIB 초대 총재로 선출됐다.
그는 “지정학적 긴장은 바다의 바람과 파도 같은 것”이라고 말했다. “이쪽저쪽으로 조금씩 밀어내지만, 우리는 중립성과 비정치성을 벗어나지 않도록 거친 물살을 항해해야 한다”는 의미다.
그는 재임 기간 “바다가 한 번도 잔잔했던 적이 없었다”고도 했다. 2016년 트럼프의 당선은 미·중 경쟁을 더 격화시켰다. 워싱턴은 이제 중국의 글로벌 거버넌스 참여를 미국 권력에 대한 위협으로 본다는 것이다.
회원국들의 시선도 흔들렸다. 캐나다는 2023년, 전직 캐나다인 AIIB 이사가 지도부에 대한 중국공산당(Chinese Communist Party·CCP) 영향력 의혹을 제기한 뒤 회원 자격을 ‘중단’했다. AIIB는 이를 “근거 없고 실망스럽다”고 반박했다.
중국은 AIIB 최대 주주로 의결권 지분 약 26%를 보유한다. 비교하면 세계은행에서 미국의 의결권은 약 16% 수준이다.
그럼에도 인도와 필리핀처럼 중국과 갈등이 있는 나라들도 AIIB와의 관계를 유지해 왔다. 진리췬은 회원국 간 분쟁에서 비롯된 어려움도 있었고, 세계 곳곳의 충돌이 만든 난관도 있었지만 상당 부분을 넘겼다고 했다.
무엇보다 그는 “각국 정부가 서로 문제를 겪더라도, 서로 다른 국적의 직원들이 적이 되는 일은 없었다”면서 “우리는 그런 문제를 겪지 않았다”고 강조했다.
/ 글 Nicholas Gordon & 편집 김다린 기자 quill@fortunekorea.co.kr